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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게 힘이다/역사

어사화는 금은화인가: 『한양가』 속 과장(科場) 풍경으로 본 조선의 꿈과 좌절

by 후쿠선장 2025.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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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화는 금은화인가: 『한양가』 속 과장(科場) 풍경으로 본 조선의 꿈과 좌절

어사화는 금은화인가: 『한양가』 속 과장(科場) 풍경으로 본 조선의 꿈과 좌절

몰락의 시대에 울려 퍼진 서울의 노래

서곡: 몰락의 시대에 울려 퍼진 서울의 노래

1844년(헌종 10년), 한산거사(漢山居士)라는 필명의 작가가 남긴 장편 가사 『한양가(漢陽歌)』는 19세기 조선의 심장, 한양의 모습을 소리 내어 읽히기 위해 쓰인 한 편의 생생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노래는 위엄 있는 궁궐과 활기찬 저잣거리를 읊으며 시작하지만, 그 시선은 이내 당대 가장 극적인 구경거리이자 시대의 모순이 집약된 현장, 바로 과거 시험장으로 향합니다.

『한양가』는 과거 시험을 미화하거나 비판하기보다, 마치 한 편의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처럼 그 아수라장을 있는 그대로 그려냅니다. 이 보고서는 바로 그 시선을 따라, 『한양가』의 운율 속에 담긴 과거 시험장의 풍경을 한 걸음씩 따라가며, 조선의 능력주의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시인이 목격한 그날의 풍경은, 실력의 겨룸이 아닌 부와 권력의 대리전으로 변질된 과거의 실상과, 그 속에서 피어난 기상천외한 부정행위, 그리고 이를 막으려 했던 국가의 처절한 사투를 담고 있는 시대의 거울입니다.

1부: 과장으로 가는 길 - 『한양가』의 서막

『한양가』의 화자는 독자의 손을 잡고 19세기 한양의 거리로 나섭니다. 그의 눈에 비친 과거 시험의 첫 풍경은 학문의 전당으로 향하는 선비들의 점잖은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터로 향하는 군대의 출정식에 가까웠습니다.

"집춘문(集春門) 월근문(月覲門)과 통화문(通化門) 홍화문(弘化門)에 / 부문(赴門)을 하는구나 건장(健壯)한 선접군(先接軍)이 / 자른 도포(道袍) 젖혀 매고 우산(雨傘)에 공석(空石) 쓰고 / 말뚝이며 말장이며 대로 만든 등(燈)을 들고 각색(各色) 글자 표(標)를 하여 등을 보고 찾아가네"

노래는 새벽의 어둠을 뚫고 궁궐의 여러 문으로 쇄도하는 무리들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유생이 아니라, '건장한 선접군'입니다. 짧게 고쳐 입은 도포를 허리에 질끈 동여맨 채, 한 손에는 우산과 빈 돗자리를, 다른 한 손에는 말뚝과 등불을 든 이들은 고용된 '자리잡이꾼'이었습니다. 그들의 등불에 쓰인 각기 다른 글자는, 그들이 소속된 '팀'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의 본질은 명확해집니다. 시험의 성패를 가르는 첫 번째 관문은 글재주가 아니라, 시관(試官)의 눈에 잘 띄는 명당자리를 차지하는 물리적인 힘이었습니다. 수만에서 많게는 십만 명에 이르는 응시자가 몰리는 상황에서, 채점관들은 관행적으로 가장 먼저 제출된 수백 장의 답안지 중에서만 합격자를 가려냈습니다. 따라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이는 곧 폭력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난장판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양가』는 이 살벌한 공간 쟁탈전을 '구경거리'로 묘사하며, 시스템의 붕괴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의 풍경을 담담히 그려냅니다.

2부: 우산 아래 펼쳐진 기만의 시장

선접꾼들이 피땀으로 쟁취한 자리에 드디어 '본진'이 들어섭니다. 『한양가』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묘사합니다.

"현제판(懸題板) 밑 설포장(雪圃場)에 말뚝 박고 우산 치고 / 휘장(揮帳) 치고 등을 꽂고 수종꾼이 늘어서서 / 접(接)마다 지키면서 엄포(嚴褒)가 사나울사 / 각각 제 접을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風雨)같이 지어내니 / 글하는 거벽(巨擘)들은 구구(句句)이 읊어내고 / 글씨 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時刻)을 못 머문다"

시제가 내걸린 현제판 아래, 거대한 우산과 휘장이 펼쳐집니다. 이곳은 단순한 시험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잘 조직된 '부정행위 기지'였습니다. 『한양가』는 이 기지 안에서 벌어지는 분업 체계를 정확히 포착합니다.

  • 거벽(巨擘), 글 짓는 두뇌: '글하는 거벽들'은 이 부정행위 산업의 핵심 기술자였습니다. 이들은 뛰어난 학식을 갖추었으나 가난하거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몰락 양반들로, 돈을 받고 즉석에서 시제에 맞는 명문 답안을 창작했습니다. 전설적인 거벽 유광억(柳光億)은 의뢰인이 지불하는 돈의 액수에 따라 장원급, 2등 급, 합격권 답안을 차등하여 써주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존재는 과거 시험이 학문의 경연이 아닌, 재능을 사고파는 시장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사수(寫手), 글씨 쓰는 손: '글씨 쓰는 사수들'은 거벽이 지은 글을 아름다운 명필로 답안지에 옮겨 적는 전문가였습니다. 좋은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시관의 눈을 사로잡을 유려한 글씨체였기에, 사수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 선접꾼과 수종꾼, 지키는 주먹: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자리를 지키고 외부의 위협을 막는 것이 바로 선접꾼과 수종꾼들의 역할이었습니다. 『한양가』가 "엄포가 사나울사"라고 묘사한 것처럼, 이들은 다른 경쟁자들의 접근을 막고 자신들의 '고객'을 보호하는 경호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접(接)'이라 불리는 팀은 선접꾼(자리 확보), 거벽(내용 창작), 사수(서체 작성)라는 완벽한 분업 체계를 갖춘 기업형 범죄 조직이었습니다. 『한양가』는 이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풍우같이 지어낸다'고 표현하며, 부정행위가 얼마나 신속하고 전문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물론 이런 '팀'을 고용할 재력이 없는 가난한 선비들은 보다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예상 답안을 아주 작은 글씨로 적어 옷소매나 붓대 속에 숨기는 협서(挾書), 심지어 콧구멍 속에 종이를 말아 숨기는 의영고(義盈庫) 등은 그들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한양가』가 주목한 것은 이런 개인적인 부정행위가 아니라, 이미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린 조직적 사기극이었습니다.

3부: 국가의 반격과 무뎌진 칼날

이러한 난장판을 국가가 수수방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법전을 통해 부정행위를 엄단하려 했고, 때로는 왕이 직접 나설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가. 법전 속의 엄벌

조선의 법전은 다양한 부정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규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과거 부정행위 처벌 규정
죄목 설명 처벌 규정 (『경국대전』 등)
차술(借述) / 대술(代述) 거벽이나 사수를 고용하는 대리 시험 행위 곤장 100대, 3년의 징역, 영구 응시 자격 박탈
협서(挾書) 커닝 페이퍼를 반입하는 행위 2회 시험 응시 자격 정지 (6년간)
암표(暗標) 시험관과 짜고 답안지에 비밀 표식을 하는 행위 유배 등 중형
과장소란(科場騷亂) 시험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 현장 체포 및 처벌, 응시 자격 박탈

이처럼 국가는 대리 시험을 가장 중한 범죄로 보고 엄벌에 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법의 칼날은 부패한 현실 앞에서 무뎌지기 일쑤였습니다.

나.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부정행위가 만연하자, 급기야 도성에는 "어사화냐, 금은화냐?"라는 동요가 울려 퍼졌습니다. 임금이 하사한 영예의 꽃 '어사화'가, 실은 돈으로 산 '금은화'가 아니냐는 조롱이었습니다. 이 노래가 유행했던 숙종 대에는 대규모 과거 비리가 적발되어 재상의 손자를 포함한 고위층 자제들이 대거 유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험관과 응시자가 미리 답안 구절을 짜고, 합격의 대가로 은(銀)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한양가』가 묘사한 헌종 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과거의 부패가 뿌리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시험장까지 땅굴을 파고 대나무 통으로 답안을 전달하려다 적발된 사건(숙종실록)은 부정행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쳤는지를 보여줍니다.

부정행위가 너무 광범위해져 개별 처벌이 불가능해지자, 국가는 시험 전체를 무효로 하는 파방(罷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죄 없는 수많은 응시자들까지 피해를 보는 조치였으며, 국가의 통제력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종장: 노래는 끝났지만

『한양가』는 과거 시험장의 소란스러운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한양의 다른 명소들로 시선을 옮기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독자의 귓가에는 "풍우같이 지어내던" 거벽의 읊조림과 "엄포가 사나웠던" 수종꾼들의 고함 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한산거사가 포착한 19세기 과거 시험장의 모습은 세도정치 아래 능력주의라는 국가의 기둥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현장이었습니다. 관직이 돈과 연줄로 거래되는 현실 속에서, 과거 시험의 공정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공허한 외침이 되었습니다. 실력 있는 인재들은 좌절하여 불법적인 재능 판매자로 전락했고, 부유하고 무능한 자들은 돈으로 관직을 사들여 국가 시스템을 더욱 병들게 했습니다.

결국 『한양가』는 번화한 도읍을 노래하는 찬가(讚歌)인 동시에, 그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있던 한 왕조의 만가(輓歌)가 되었습니다. 시인의 눈에 비친 과거 시험장의 혼돈은,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서글픈 전주곡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더 이상 '어사화'는 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금은화'만이 욕망의 이름으로 만발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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