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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게 힘이다/역사

탑 아래에서의 속삭임, 기러기 앞에서의 맹세

by 후쿠선장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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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아래에서의 속삭임, 기러기 앞에서의 맹세

옛 한국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서사적 역사

서론: 사랑의 두 세계

8세기 신라, 축제에서 만난 화랑 용사와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는 여인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8세기 조선, 규방에 갇힌 채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에 미래가 결정되는 양반집 규수를 떠올려 보세요. 이 두 장면은 한국 역사 속에서 '사랑'과 '결혼'이라는 가장 내밀한 제도가 얼마나 극적으로 변해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글은 고려 이전 시대에서 조선시대로의 전환이 단순히 왕조의 교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 맺음 방식을 어떻게 재설계했는지를 탐구합니다. 국가가 주도한 성리학의 수용은 여성의 주체성, 전략적 구애,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했던 세상을 엄격한 가부장제와 정형화된 의례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한 민족의 심장을 뛰게 했던 이야기와 관습, 법의 흔적을 따라 그 거대한 변화의 과정을 함께 거닐어 보겠습니다.

제1부: 열정과 전략의 시대 (고려 이전 및 고려)

이 장에서는 개인의 욕망, 정치적 야망, 사회적 관습이 한데 어우러져 결혼에 이르는 길이 다채롭고 역동적이었던 시대를 그려봅니다.

제1장: 운명적인 발길질과 끊어진 옷고름: 연인들은 어떻게 만났는가

김춘추와 문희의 전략적 구애

이야기는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 문희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김유신과 김춘추는 당시의 축구와 비슷한 '축국(蹴鞠)'을 즐기고 있었죠. 격렬한 몸싸움 중, 김유신은 마치 실수인 것처럼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습니다. 이것은 우연을 가장한 치밀한 계획의 서막이었죠. 김유신은 당황하는 김춘추를 자기 집으로 이끌며 옷고름을 꿰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김유신은 먼저 큰누이 보희에게 부탁했지만, 그녀는 사소한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바로 그때, 운명의 무대는 둘째 누이 문희에게 넘어갔습니다. 아름다운 문희가 나타나 정성껏 옷고름을 꿰매주는 동안, 두 젊은 남녀 사이에는 특별한 감정이 싹텄고, 이 만남은 비밀스러운 관계로 발전해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은 분노하는 대신,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정치적 연극을 기획했습니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누이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공표하며 마당에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시커먼 연기 기둥이 하늘로 치솟자, 마침 남산에 행차 중이던 선덕여왕(당시 공주)의 눈에 띄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여왕은 사건의 배후에 김춘추가 있음을 직감하고 "네 소행이니 어서 가서 구하라"고 명했습니다. 왕명을 받은 김춘추는 말을 달려가 문희를 구하고, 마침내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혼례를 올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닙니다. 사랑이 어떻게 정치적 야망의 도구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죠. 가야 왕족의 후예로서 신라 핵심 권력층에 편입되려 애쓰던 김유신에게, 누이와 왕위 계승 유력자인 김춘추의 결합은 가문의 미래를 건 최고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관계를 공적인 사건으로 만들어 왕실의 개입을 유도했고, 이를 통해 가문을 왕실과 성공적으로 연결했습니다. 이처럼 '자유연애'처럼 보이는 행동 뒤에는 종종 냉철한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만남을 위한 사회적 공간

김춘추와 문희의 만남이 비록 치밀한 계략의 산물이었다 해도, 그런 만남 자체가 가능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는 남녀 교제에 있어 조선보다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탑돌이' 풍속입니다. 흥륜사 같은 큰 사찰에서 탑을 도는 이 의식은 젊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인연을 맺는 중요한 사교의 장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이야기도 바로 이 탑돌이에서 시작되죠. 이처럼 사찰이나 축제 같은 공공장소는 남녀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감정과 선택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던 시대적 특성을 반영합니다.

제2장: 노래 한 곡으로 왕후를 얻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

백제의 서민 청년 서동(薯童)과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 이야기는 당시의 사랑이 신분과 국경을 넘어설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설화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를 캐어 팔며 살아가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기발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잠입해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환심을 산 뒤, 직접 지은 노래를 퍼뜨렸습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선화공주님은 (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시집가서 (他密只嫁良置古)
서동 서방을 (薯童房乙)
밤에 몰래 안고 간다 (夜矣卯乙抱遣去如)

이 짧은 동요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대궐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소문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국왕은 사회적 체면과 공주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판단했고, 결국 사랑하는 딸을 머나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귀양길에 오른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 자신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밝히고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공주가 가져온 황금을 기반으로 민심을 얻은 서동은 훗날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武王)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설화는 노래가 가진 주술적 힘, 즉 여론을 형성하고 현실을 바꾸는 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서동은 군사력이 아닌, 대중의 심리를 파고드는 '노래'라는 미디어를 통해 신분과 국경의 장벽을 넘어 사랑과 왕위를 모두 쟁취한 것입니다.

물론,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쟁이 있습니다. 이는 서동요 설화가 후대에 윤색되었거나, 무왕에게 여러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역사 해석의 복잡성을 더해줍니다.

제3장: 사위를 위한 집: 서옥제와 처가살이의 세계

고구려의 독특한 혼인 풍습인 '서옥제(壻屋制)'는 당시 가족 구조와 남녀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 풍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상의 고구려 청년의 혼인 과정을 따라가 볼까요? 먼저, 두 집안은 서면 계약 없이 구두로 혼인을 약속합니다. 혼례 당일 저녁, 신랑은 신부의 집에 도착해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신부와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두세 차례 간청해야 합니다. 허락을 받으면 신랑은 신부의 부모가 본채 뒤에 미리 지어놓은 작은 별채, 즉 '서옥(사위의 집)'으로 안내됩니다. 신랑은 예물을 가져와 서옥 옆에 쌓아두고, 신부와 함께 그곳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처가살이는 아이를 낳아 장성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 기간 동안 신랑은 처가의 일원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죠.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신의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인, 장모의 집에 간다'는 의미의 '장가간다'는 말은 바로 이 풍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러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처가살이 풍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도 이어진 한국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근간에는 농경 사회에서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발생하는 노동력 손실을 사위가 자신의 노동으로 메우려는 경제적 논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 풍습은 여성의 지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혈족과 유대를 유지하며 친정의 보호 아래 생활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내에서 안정적이고 강력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여성이 호주(戶主)가 될 수 있고, 아들과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과 직결됩니다. 당시의 가족은 조선처럼 엄격한 부계 중심의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유연하게 확장되는 '양측적 친족 네트워크'에 가까웠습니다. 이처럼 여성과 모계의 역할이 중시되었던 사회 구조는 모든 권력과 재산, 혈통 계승이 오직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는 조선시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제2부: 규칙과 의례의 시대 (조선)

이 장에서는 성리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사랑과 결혼이 개인의 감정 표현이 아닌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제도로 변모하는 과정을 살펴봅니다.

제4장: 너울 너머의 침묵: 남녀유별의 세계

조선 사회의 남녀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원리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었습니다.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서 유래한 이 말은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이 되면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단순한 격언을 넘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예(禮)'로 강제되었습니다.

이 원칙은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양반가 여성들은 외출 시 너울이나 처네 같은 가리개로 얼굴을 가려야 했고, 이는 외부 남성과의 시선 접촉조차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남성 화가가 양반집 규수의 얼굴을 마음대로 쳐다볼 수 없어 여성 초상화의 맥이 거의 끊겼고, 남성 의원이 여성을 진찰할 수 없어 보구녀관(保救女館) 같은 여성 전용 의료기관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성별 분리는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자연스러운 만남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축제나 사찰처럼 남녀가 어울릴 수 있었던 공적인 공간은 이제 엄격히 분리되고 통제되었습니다. 사랑과 결혼은 분리되었고, 전자는 사회를 혼란시키는 위험한 감정으로, 후자는 가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제도로 재정의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조선 왕조가 안정적인 위계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 국가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통제함으로써 국가는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족의 형성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만남을 막는 것은 배우자 선택권을 개인에게서 박탈하여, 국가가 정한 위계질서에 따라 행동할 가문의 가장에게 온전히 위임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따라서 남녀유별은 낡은 고려의 유풍을 단절하고, 가족 단위에서부터 새로운 조선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제5장: 중매인의 장부: 서류와 운명으로 맺어진 혼인

조선시대의 혼인은 당사자들의 만남이 아닌, 중매인(仲媒人)의 분주한 발걸음과 양가 어른들의 냉철한 계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의혼(議婚)'이라 불리는 첫 단계에서 중매인은 양가의 문벌, 가풍, 재산 등을 면밀히 따져 어울리는 상대를 물색했습니다. 중매인 없는 혼인은 가문의 수치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혼담이 오가면, 신랑 측에서는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신부 측에 보냈습니다. 흰 종이를 다섯 번 접어 붉은 보자기에 싸서 보내는 이 서신은 단순히 생년월일을 알리는 것을 넘어, 두 사람의 운명적 조화, 즉 궁합(宮合)을 보고 길한 혼인 날짜를 잡기 위한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신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길일을 정해 회신하면, 혼인은 사실상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후 납채서(혼약을 청하는 편지), 연길장(혼인 날짜를 알리는 편지), 납폐서(예물을 보낸다는 편지) 등 복잡한 서신 교환이 이어졌습니다. 유교 예법인 '육례(六禮)'에 따른 이 절차들은 신랑과 신부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태에서 혼인이 법적, 사회적으로 완결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결혼은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채, 가문의 어른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엄숙한 계약이었습니다.

제6장: 기러기와 밤, 그리고 합환주: 혼례일의 상징들

조선시대의 혼례, 즉 '대례(大禮)'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이자, 유교적 가치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연극이었습니다.

혼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전안례(奠雁禮)'였습니다. 신랑은 신부 집에 도착하여 장모 될 사람에게 나무 기러기 한 쌍을 바쳤습니다. 기러기는 한 번 짝을 맺으면 평생을 함께하는 새로 알려져 있어, 이는 백년해로에 대한 굳은 서약을 상징했습니다.

이어지는 '교배례(交拜禮)'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에게 큰절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공인되었음을 알리는 엄숙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합근례(合巹禮)'에서는 하나의 표주박을 쪼개 만든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라 나누어 마셨습니다. 이는 이제 두 사람이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합쳐졌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이 모든 의식은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축하를 넘어, 공동체 전체가 이들의 결합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를 증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조선의 혼례는 개인의 감정을 축복하는 자리가 아니라, 부부에게 유교적 가치관, 즉 평생의 신의, 위계질서, 그리고 가문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각인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교화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제7장: 문턱을 넘어서: 시집살이라는 새로운 삶

신부에게 혼례의 끝은 새로운 고난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우귀(于歸)'라 불리는 신행길에 올라 남편의 집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분리되어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편입되었습니다.

시댁에 도착한 신부가 가장 먼저 치러야 할 의식은 '폐백(幣帛)'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부모와 시댁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대추와 밤 같은 음식을 바쳤습니다. 여기서 대추는 아들을, 밤은 딸을 상징하며,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암시했습니다.

이후 시작되는 '시집살이'는 신부의 혹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댁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구성원으로서, 시어머니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놓였습니다. 그녀의 삶을 옥죄는 법적, 사회적 장치는 견고했습니다.

첫째,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를 명시했습니다. 시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음행, 질투, 유전병, 수다스러움, 그리고 도둑질이 그것입니다. 이 조항들은 매우 자의적이었으며, 남편과 시댁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둘째, '재가 금지법(再嫁禁止法)'은 과부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했습니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의 양반가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평생 수절하며 죽은 남편의 가문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러한 억압적인 구조는 조선시대 여성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담은 '시집살이 노래'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가족은 국가를 축소해 놓은 작은 국가, 즉 '마이크로-스테이트'와 같았습니다. 가부장의 절대적 권위, 위계질서의 엄격한 준수, 개인의 희생을 통한 공동체의 유지라는 원리는 국가 통치 이념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운 며느리는 왕에게 충성하는 아들을 길러내는, 국가적 이데올로기 재생산의 가장 중요한 담당자였던 것입니다. 시집살이는 곧 정치적 복종을 위한 훈련장이었습니다.

제3부: 규범 너머의 사랑

엄격한 제도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공식적인 혼인 제도의 안과 밖에서 끈질기게 피어났던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탐색합니다.

제8장: 역경을 넘어선 사랑: 왕의 순애보와 금지된 로맨스

과거로부터의 다리: 공민왕과 노국공주

조선 건국 직전, 고려 말의 공민왕과 원나라 출신 왕비 노국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의무 중심적 부부 관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비록 정략결혼으로 시작되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깊은 정서적 교감과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노국공주는 원나라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신, 남편의 반원(反元)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들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공민왕은 모든 국정을 내팽개치고 오직 죽은 아내를 추모하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는 결국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혼인 관계 안에서도 열정적인 사랑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애틋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예외: 사대부와 기생의 사랑

조선 사회의 엄격한 남녀유별은 역설적으로 '기생(妓生)'이라는 독특한 존재를 탄생시켰습니다. 관아에 소속된 천민 신분이었지만, 당대의 기생들은 시, 서, 화, 그리고 음악에 능통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대부 남성들이 아내와는 나눌 수 없었던 지적, 예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피어났습니다. 천하의 유혹자였던 기생 황진이와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의 이야기는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정신적 교감의 상징입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오히려 그의 높은 학문과 인품에 감화되어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지적인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반면, 함경도 경성의 기생 홍랑과 시인 최경창의 사랑은 비극적이지만 열정적이었습니다. 홍랑은 서울에서 병든 최경창을 간호하기 위해 관기를 관할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한 국법을 어기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최경창이 죽은 후, 그녀는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어 다른 남성들의 접근을 막고 평생 그를 기리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지극한 순정에 감동한 최경창의 가문은 그녀가 죽자 그의 무덤 곁에 묻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결혼은 가문의 대를 잇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의 영역이었습니다. 반면, 열정, 낭만, 지적 교감과 같은 '사랑'의 감정은 종종 혼인 제도 밖, 기생과의 관계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엄격한 제도가 가정 내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감정이 다른 형태로 분출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 셈입니다.

결론: 현대인의 마음에 남은 과거의 메아리

고려 이전 시대와 조선시대의 연애 및 결혼 풍습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의 근본적인 차이가 빚어낸 두 개의 다른 세계였습니다. 구애 방식은 전략적 만남과 자유로운 교제에서 가문의 결정에 따른 중매로, 결혼 과정은 비교적 간소한 약속에서 복잡한 서류와 의례로, 결혼 후의 삶은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대적 주체에서 절대적 종속으로 극적인 전환을 겪었습니다.

신라와 고려의 낭만적이고 때로는 대담했던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운명적 사랑의 원형으로 남아 미디어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 뿌리내린 가문 중심의 사고방식과 부부 및 고부 관계에 대한 유교적 관념은 여전히 현대 한국 사회의 결혼관과 가족 관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탑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였던 여인과 기러기 앞에서 묵묵히 맹세했던 여인의 후예로서, 과거의 두 세계가 남긴 상반된 유산 속에서 여전히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 1: 시대별 연애 및 결혼 풍습 비교 개요
특징 고려 이전 시대 (삼국/고려) 조선시대
구애 방식 '자유연애', 전략적 만남, 탑돌이 등 공공장소에서의 교제가 주를 이룸. 개인의 의지와 야망이 중요한 역할을 함. 중매인을 통한 '중매혼'이 절대적. 개인의 의사는 가문의 결정에 종속됨.
남녀 교제 공공장소나 사회적 행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했음. '남녀칠세부동석'에 기반한 엄격한 분리. 미혼 남녀 간의 교제는 거의 불가능했음.
결혼 절차 구두 약속에 기반한 비교적 간소한 절차. 고구려의 '서옥제'와 같은 독특한 의례가 존재함. 사주단자, 혼서 등 유교적 '육례'에 따른 고도로 형식화되고 문서화된 절차.
혼인 후 거주 '서옥제'에서 보듯 '처가살이'(남귀여가혼)가 일반적. 신혼부부는 장기간 신부의 집에서 거주함. '시집살이'(친영제)가 원칙. 신부는 혼례 직후 또는 단기간 내에 신랑의 집으로 들어감.
여성의 법적 지위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 호주가 될 권리, 아들과 동등한 재산 상속권, 비교적 자유로운 이혼 및 재혼이 가능했음. 지위가 현저히 하락. 남편 가문에 종속되었으며, '칠거지악'과 과부의 재가 금지법 등으로 억압받음.
사랑의 개념 결혼 및 정치 전략과 통합됨. 공민왕의 예처럼 결혼 내에서의 열정적 사랑이 가능하고 찬미됨. 결혼과 분리됨. 결혼은 의무와 혈통 계승을 위한 것. 열정적·지적 사랑은 기생과의 관계 등 혼인 밖에서 추구됨.
결혼의 주된 목적 가문 간의 동맹, 노동력 확보, 개인적·정치적 전략, 가계 계승. 부계 혈통의 유지, 사회 위계질서의 공고화, 조상 제사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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